소아시아성지연구-사데교회 조근식 Hit : 6387 


사데 교회 - 아데미 여신전터와의 공존

사데(Sardis)는 주전 약 10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사데는 당시 히타이트 제국의 서부 국경에 접해있던 한 지방 봉국의 수도였던 것 같다. 사데 근교에서 발견된 한 석조 부조물을 살펴보면 이 시기의 히타이트 제국은 그 영향력이 상당히 멀리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주전 1200년경으로부터 주전 7세기 초엽까지는 사데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메름나르드(Mermnard) 왕조의 창건자인 기게스(Gyges, 주전 685-645년 경) 당시에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고증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대략적인 추론은 가능하다. 킴메리아인들은 프리기아 제국의 수도였던 고르디움(Gordion)을 정복한 후에 이곳 사데에 침입하여 파괴를 자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디아 왕국에는 풍부한 자원과 유능한 통치자들이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 이후 사데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크로이수스(주전 561-546)때에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고대 유물을 살펴보면, 리디아의 통치자들은 델포이(Delphi)와 밀레토스(Miletus)에 있던 아폴로신전과 또한 에페수스에 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에 금과 은을 선물로 보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디아인들은 성경에서도 ‘룻(lud)’라는 명칭으로 몇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창 10:22, 대상 1:17; 사 66:19). 예레미야 46:9에는 ‘루딤인’ 즉, ‘룻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들은 주전 605년 유프라테스 강변의 갈그미스전투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대치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바로 느고 2세가 고용하고 있었던 ‘용병’이었던 것 같다.

당시 리디아 왕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량의 금과 은의 광물생산이 가능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트몰루스 산맥(Mt. Tmolus)에서 형성된 비구름으로 인해서 팍톨루스(Pactolus) 강으로 많은 양의 강수가 유입되었고, 그로인해 금은합금을 함유하고 있는 수많은 광물이 퇴적되었던 것이다. 트몰루스 산맥의 일부 지역에 대해 지질 조사를 실시한 결과, 1㎥당 2g의 금이 함유된 것으로 밝혀졌을 정도이다. 이사야 45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에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줄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화란 아마도 고레스가 사데에서 노획한 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어진다.

사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통치는 주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알렉산더 사후로부터 주전 190년까지는 리시마커스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에 의해 차례FA 다스려졌다. 이후 로마시대에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공을 세운 페르가뭄(Pergamum)의 유메네스 2세에게 사데 및 주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졌다. 페르가뭄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탈로스 3세는 주전 133년에 로마에게 자신의 왕국을 헌납하였고, 이 때 사데는 로마의 속주로 병합이 되었다. 사데는 주후 17년과 26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수차례 재건되기도 하였다. 주후 1세기경에는 도시 인구가 수십만에 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적을 보면 로마시대 당시에 이 도시가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같은 번영은 주후 616년 사산왕조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는 지속되었다. 이후 사데는 동로마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요새화 되었고,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이름 없는 도시로 전락하였다.

요한계시록 3:1-6절에 나오는 메시지에서 사데 교회는 당시 여러 가지 유혹에 완전히 굴복하고 있는 상태였음을 보게 된다. 즉 잘못된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배교 행위가 일어난다든가, 황제숭배에 굴복한다든가, 전심으로 신앙을 지키지 않는 등의 일이 많았다. 그래서 성경본문은 사데 교회를 가리켜 ‘죽었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가 만일 깨어나지 아니한다면 도적같이 이르러 형벌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셨다. 이같은 경고의 말씀은 과거 사데가 고레스 대왕이나 안티오커스 3세에 의해 야간기습으로 인해 점령당했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모두가 잠든 사이에 갑작스러운 형벌을 당할 수도 있음을 가리키는 예언이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데에는 깨어서 신앙을 지키는 신실한 신자들도 있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의복을 더럽히지 않았기에 흰옷을 입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흰옷은 곧 영원한 복락을 의미하며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공인되어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1) 사데교회의 유적들

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사데 교회의 유적 중 하나가 아르테미스 신전의 동남쪽 모서리 바로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고학에서는 이를 가리켜 ‘M’ 유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교회 유적은 이방신전을 성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한 장례예배를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남쪽 열주를 지나면 이 교회로 통하게 되는데, 예배당은 단순한 홀의 형태를 띠고 있고 후진(後陣, 교회당 동쪽 끝에 내민 반원형 부분)에는 창문이 있었다. 북쪽에는 작은 문이 있어서 안뜰로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바닥은 대리석이었고 건물 내벽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래 건물벽에는 석고가 칠해져 있었고 내외부에 장식이 꾸며져 있었다. 제단 받침대는 대리석이었고 그 위에다가 사암으로 된 선반이 놓여져 있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가장 초기의 제단 중 하나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예배당 안뜰에서는 주화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추정해 볼 때 교회건물이 최소한 주후 400년경 이전에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향하는 길의 오른쪽 편에는 교회 건물이 두 개 더 있음이 확인 되었다. 둘 중에 좀 더 큰 건물이 더 오래된 것이고 4세기 중엽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데,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되 교회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물의 웅장함으로 보아 당시 사데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공동체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파편들 밖에 남지 않았지만 교회 건물의 기본적인 설계는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성전 앞뜰이 있었고, 넓은 홀이 있었으며, 통로를 갖춘 회중석이 있었다. 현재 유적에는 동쪽 부분에 두 번째 세워진 교회 유적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본래 건물의 후진부분이 부벽으로 지지되고 있고, 이러한 특징으로 동쪽의 이후 유적과 구분 가능하다. 그러나, 천정 부분은 구분이 불가능하다. 교회건물은 세월이 흘러 가면서 여러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2) 사데의 유대인 회당

사데에는 일찍이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 왕족들, 귀족들, 군사들, 서기관, 제사장, 장인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왕하 24:10-16). 이후 주전 539년에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제2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주전 5세기 중엽에 쓰여졌던 오바댜 1장 20절에 따르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이르게 될 것이고 그 때에 유대인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피난처가 스바랏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스바랏(Sepharad)’이 바로 사데의 셈어 명칭이다.

또한 셀류커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3세가 2,000여명의 유대인들을 바벨론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데리고 와서 프리기아와 리디아에 정착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사데가 셀류커드 왕조의 행정 중심지가 되면서부터 이곳에는 많은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데에 있는 유대인 회당은 오늘날 알려진 것들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본래 이 회당은 주도로와 짐나지움 사이에 세워져 있던 바실리카 건물이었다. 그러던 것이 주후 150-250년 사이에 회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유대인 회당으로서는 드물게 큰 규모에다가 화려한 장식이 있고 또한 유대인 회당이라고 명시하는 비석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데에서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현존하는 형태는 주후 320-340년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열주로 이루어진 입구와, 안뜰, 그리고 기다란 회중 홀로 이루어져 있다.

성전의 앞뜰에서는 기하학적인 모자이크 문양을 가진 타일바닥들로 꾸며진 주랑이 있다. 모자이크 장식으로 꾸며진 벽에는 기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를 들면 “나 아우렐리우스 폴리포스는 이전에 맹세하였던 서원을 이행하였기에 이처럼 기증 합니다”와 같은 방식이다. 주랑의 모퉁이 쪽의 기둥은 하트모양을 하고 있고 이오니아식의 기둥머리 모양을 갖추고 있다. 회당 안뜰의 벽들은 본래 석고가 발라져 있었지만 이후에는 대리석으로 덧씌워졌다. 안뜰의 주랑은 나지막한 난간으로 측면 쪽의 통로가 구분되어져 있다. 안뜰 가운데에는 크레이터 모양의 조그만 대리석 분수가 놓여있다. 이 분수는 회당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 전에 손을 씻는 곳이었다. 그러나 건물 앞마당이 공공장소로서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처럼 이 분수 역시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회당 중앙 홀은 약 천명 정도가 수용 가능했다. 먼저 입구 좌우 면에는 박공벽으로 만든 성소가 있었다. 이 성소는 토라 두루마리를 안치시켜 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입구 반대편 쪽에는 반원형의 벤치들이 있었는데 이는 장로들이 앉는 곳이었다. 그 앞에는 커다란 대리석으로 된 탁자가 있다. 이 탁자는 다른 회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토라를 낭독할 때 두루마리를 펼쳐서 고정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탁자 좌우편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사자상이 있다. 중앙 홀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었다. 아치형의 창벽에는 안뜰의 분수와 유사한 항아리가 놓여 있었고, 후진 앞의 바닥에는 두 마리의 공작들이 포도 넝쿨모양의 문양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중앙 홀의 벽들은 채색 대리석들로 덧씌워졌다. 중앙 홀 내벽 상층부는 채색과 더불어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되기도 했다. 중앙 홀의 지붕은 좌우에 받침기둥으로 지지되었다. 홀 중앙의 기둥 중 네 개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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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11/10/14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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